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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모로코] 마라케시행 기차
분류: 여행
이름: pazu * http://www.cafe1871.net


등록일: 2009-06-09 15:48
조회수: 3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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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되자 플랫폼은 사람들로 조금씩 붐비기 시작했고 이러다 자리잡고 않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카사블랑카 공항에서 마라케시로 가려면 이 곳 까사 오아시스 역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한다. 저멀리 플랫폼으로 기차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고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 알 수 없는 기차는 이미 대부분의 좌석이 채워져 있었다. 이리 저리 두리번 거리다 그나마 사람이 적어 보이는 객차에 탔으나 우리 셋이 함께 앉을 수 있어 보이는 곳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드문 드문 빈 자리를 찾아 수지와 어머님은 서로 마주 보며 따로 앉았고, 나는 그 다음 줄의 좌석에 혼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자리에 앉은 후 두리번 거리며 주위를 살피니 모두들 우리 셋을 신기한 듯 바라 보는 듯 하다. 바라보는 사람마다 모두 나와 눈이 마주친다. 플랫폼에서 보았던 관광객 같아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탔는지 보이지 않고 객실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모로코 사람으로 보였다. 그 바라보는 기세에 눌려 위축된 채로 몇분을 그렇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유럽이나 다른 지역을 갔을 때도 이런 위축감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그들의 복장부터 나를 낮설게 했다. 사실 출발하던 날 밤 인천공항에서 티켓팅을 하기 위해 줄을 섰을 때 전통복장을 입은 한 무리의 아랍사람들과 그 옆에 앉아있는 여자들의 발에 까맣게 그려진 헤나를 보았을 때 내가 무척 낮선 곳을 가는구나 하는 부담감을 느끼긴 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 객차 분위기에 겨우 익숙 해진 후 나는 객차 통로에 있던 우리들의 배낭을 선반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는 내 앞 좌석에서 신문을 보고 있는 할아버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할아버지는 아까부터 신문을 보면서 나를 가끔 흘끗흘끗 바라 보았는데 그 시선이 그리 호의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신기하다거나 또는 무관심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무심하게 신문을 읽고 있는 그는 무섭진 않으나 아주 강직하고 바른 심성을 지녔을 듯한 용모에 얼굴이나 몸 어디에도 군살 하나 없어 보여 매우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처럼 보였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프랑스어를 잘 구사하는 모양이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아까부터 프랑스어로 발행되는 석간 신문을 읽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보았던 큐리어스시리즈 모로코편에서는 프랑스어를 잘 할수록 세련된 분위기를 풍길 수 있으며, 이를 발판으로 어떤 경우엔 상류층으로 진출할 수도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머리에 쓰고 있던 삼각 고깔 모양의 털모자는 아주 오랜 만에 보는 것이었다. 아마도 약 30년도 넘게 아주 오래 전에 보았던 물건이었다. 어릴 적 살던 동네 앞집에 외골수에 매우 깐깐하시던 할아버지가 살고 계셨는데 그 할아버지가 쓰던 털모자와 똑같다. 옛날엔 할아버지들이 저런 모자를 겨울에 많이 썼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며 그 모자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러면서 그 모자를 쓴 내 앞의 할아버지 또한 외골수에 깐깐한 할아버지의 성격을 닮아 보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매우 익숙한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띠리띠리리~ 띠리띠리리~". 너무나 익숙한 이 벨소리...... . 할아버지의 주머니에서 울리는 소리임을 확인하곤 난 웃음이 나왔다. 영화 러브액츄얼리에서의 사라의 벨소리였다. 마음속으로 좋아하던 칼과 데이트를 한 후 함께 있던 그 결정적 순간에 울렸던 벨소리. 동생의 전화인 줄 알면서도 다른 사람 같으면 받지 않을 그 전화를 그 순간에 몇번씩 받아 통화를 했던 그 사라의 벨소리. 두 사람과  그 벨소리가 서로 너무 어울리지 않았지만 한편으로 그 벨소리에서 왠지 고지식함과 세상 변화에 무관심함이라는 닮은 점이 있어 보였다. 아마 이 벨소리는 노키아핸드폰에서 제공하는 가장 기본적인 벨소리인 모양이다.

다음 역에서 내리겠지 하는 나의 생각과는 달리 할아버지는 내가 내릴 때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신문을 보던 할아버지는 하나씩 정리를 하더니 지갑을 꺼내 들었다. 지갑은 얇아 보였는데 그 속에는 비자 신용카드 한 장이 다소곳하게 들어 있었다. 카드사용이 많지 않다는 모로코에서 지갑에 카드를 갖고 다니고 몇십년 전에 보았던 털모자를 쓰고 프랑스어로 발행되는 석간 신문을 보고 있는 이 할아버지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그의 과거를 조심스럽게 추측해보았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문맹률이 50%가 넘는 모로코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지방의 도시에서 중간급 이상의 공무원을 하지 않았을까...... .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프랑스 식민시대를 지나 독립을 하는 모로코의 과거 몇몇 모습들이 아른거리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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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sie
와, 그때 그 기차안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다! 너무 영화같은 분위기였지. (우리까지 포함해서) 낯설은 질감이 한데 어울린 듯한, 저 어색한 기차안의 모습.
2009-06-10
11:12:34
juliet
사진이 너무 감동적이예요...앞으로 신의 손이라 부를게욤..
2009-06-16
13: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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